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드 2세 (문단 편집) === [[콩고 독립국]] 수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kurir.rs/kralj-leopold-ii-foto-profimedia-1433342750-672501.jpg|width=100%]]}}} || || '''말년의 레오폴드 2세''' || 그의 시대는 [[제국주의]]의 절정기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대다수 서방 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대였다. 허나 당시 레오폴드 2세의 [[콩고 독립국]]에서는 고무 생산을 위한 행해진 유럽인 관리관들이 저지른 원주민 학대 행위는 두고두고 논란을 일으킨다. 레오폴드 2세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만이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에 비해 후발주자인 벨기에는 아직 마땅히 해외 식민지가 없었고 그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벨기에]]는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식민지 구입을 시도했다. 사실 여기까지였다면 당대에 흔했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 군주의 행보였다. 그는 벨기에 정부에서 돈을 지원받아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하려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줄 터가 없었던 스페인 측이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왜냐하면 필리핀은 스페인이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식민지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할 때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필리핀]]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식민지로 넘어간다.] 그 후로도 그는 [[식민지]]를 얻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던 때는 서구 열강의 세계 식민지 쪼개먹기가 절정에 이르던 때라 후발주자였던 [[벨기에]]가 건드려 볼 만한 식민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계획이 차질을 빚던 와중에 당대엔 미개척지[* 사실 [[콩고]] 자체는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인과의 교역으로 라틴 문자와 [[기독교]]가 들어온 지역이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당시 주도권을 잡았던 바콩고 왕국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고 수십여 개의 국가들이 서로 다투던 형국이었다. 그리고 굳이 종주권을 주장하려는 국가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정도가 있었는데 이미 두 나라는 세가 악화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딱히 종주권을 주장할 만한 처지는 안 됐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몇몇 나라들을 겨우겨우 유지하는 판국이었고 이미 그 시절에도 이런저런 나라들이 독립해나가는 처지였다.]였던 [[콩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에 벨기에의 근거지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도 콩고의 지배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는 외무부의 아우구스테 램버몬트 [[남작]]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서 "아프리카에서 뭔가 일을 해보고 싶네. 다른 나라의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네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도 나서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여야 하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자 목표일세."라며 콩고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를 연구하고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브뤼셀]]에서 [[지리학]] 회담을 개최했다. 물론 레오폴드 2세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했다. "여러분들을 브뤼셀로 초대한 것은 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제 나라 벨기에는 자그마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라이며, 저에게 많은 면에서 만족을 안겨주는 나라입니다."라며 이야기하자 많은 참가자들이 레오폴드에게 매혹되었고 그들은 그를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취할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1876년 9월 14일 [[브뤼셀]]에서의 지리학 회담 이후, 레오폴드 2세는 40여 명의 벨기에인 실업가, 군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콩고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개척지의 탐험과 더불어 고통 받는 [[흑인]]을 돕는다"는 인도주의였지만 당연히 실제 목적은 콩고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이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일기에 "아프리카라는 엄청난 케이크를 얻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 [[미국인]] 탐험가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Morton_Stanley|헨리 모턴 스탠리]]를 보내 콩고 지역을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는 이 탐사를 "아프리카 흑인을 돕기 위한 박애주의와 학문적 탐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얼마나 그럴듯했는지 레오폴드 2세에게 기부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진심으로 아프리카 현지인들을 위해서 열강의 진출을 도운 유럽인들도 꽤 많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국가들을 구워삶았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콩고 지배를 강대국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미국]]에 로비를 했는데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콩고에 흑인을 위한 나라가 생기면 귀찮은 [[미국 흑인]]들이 다 그쪽으로 건너가서 살겠지?"라는 생각을 해서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일부 미국 흑인들도 "미국에 계속 있어봐야 백인 밑에서 개고생할 뿐이다"라는 생각에 찬성했다. 이에 [[미국 정부]]도 "[[미국인]]들이 콩고에서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 수 있도록 보장하고, 콩고에서는 미국 상품에 면세 혜택을 주겠다"는 레오폴드 2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 콩고의 부족장이 사인했던 조약문 하나를 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 문서에 "콩고 협회가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미국 정부도 속아넘어갔다. 그렇게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최초로 콩고 독립국을 승인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다른 강대국들도 설득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위와 같이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그 권모술수의 달인이라 불리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 속였다.[* 물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조차도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협회와 콩고 부족장들 간의 조약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의도야 어쨌든 후대의 반제국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외교적인 오점 중 하나로 지목된다.] 그는 자신을 콩고의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문명화를 하려는 모범적인 이미지로 포장했고 결국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의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 받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때 그가 얼마나 선전과 거짓말을 얼마나 잘 써먹었는지 그가 콩고의 지배권을 갖게 되자 각 나라의 대표자들이 그라면 콩고와 흑인들에게 잘해줄 거라고 착각해서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서 뛰면서 기립박수를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